처음 이 영화를 본 것이 2003년이었나 보다. 2003년 12월 28일에 쓴 글이 있는 걸 보면. 아마 그때도 혼자 봤을 것이다. 그 즈음이라면 깊게 만난 사람과 헤어진지 몇 년 되었을 때였고, 또 잠깐 만난 사람과도 헤어진 상태. 그러니까 몇 번의 이별 후에 영화를 본 것.


EBS 라디오에서 해주는 소설 낭독을 자주 듣는다. 요즘은 다시 듣기로 '냉정과 열정시대'를 듣고 있다. 배우 진태현과 박시은이 낭독 하는데 둘의 목소리가 준세이와 아오이로 참 잘 어울린다. 책을 읽으려고 사놓기도 했는데, 여하튼 요즘 이걸 듣느라 영화도 다시 봤다.

10여 년전에 봤을 때와 다른 건 더 많은 아픔이 느껴졌다는 것이고, 같은 건 여전히 나는 '준세이'나 '아오이'가 아닌 '마브'와 '메미'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냉정'과 '열정'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때 쓴 글을 올린다.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가슴에 담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그다지 절망적이거나 슬퍼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일을 하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밥을 먹고, 쇼핑도 하고 또 섹스도 하고...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일지 모른다. 그래서 적당한 사람과 만나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할지 모른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마음을 가졌다.

남자 주인공 준세이, 여자 주인공 아오이 그리고 준세이를 좋아하는 메미, 또 아오이를 좋아하는 마브가 나온다. 대부분 사랑 영화가 그렇듯이 주인공끼리는 서로 갈망하고, 그 둘을 좋아하는 메미와 마브같은 존재는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자신이 준세이가 아닐까 혹은 아오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겠지. 그래서 그토록 그리워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될 것이며 새롭게 사랑을 이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겠지.

사실 그토록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나는 준세이나 아오이가 아니라 메미나 마브일지 모른다. 만약 지금 당장 그 사람에게 달려간다고 해도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영화처럼 우수에 젖어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게 메미나 마브일 것이니까. 그의 사랑을 위해 떠나줘야 하는 역할이니까.

그래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슬픈 결론을 내려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200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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